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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전을 불태우자고 주장했고, 리스트에 반대했다[1]. 하지만 정전 체계는 서구의/백인의/남성의/이성애적 목록에 지역의/다인종의/여성의/퀴어한 목록을 더해 스스로를 보완하고, “권위의 교차 참조”[2]를 통해 참조자=독자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듯 했다. 리스트에 반대했던 우리는 어느새 리스트 작성자로 청탁되어, 대안적 리스트에 한 줄을 더하거나 기성의 리스트에 편입해갔다. 이러한 풍경 속에서 나는 고전(이 될) 작품의 분석이 아니라 고전이라는 개념의 분석을 통해, 그것을 각자가 전유할 수 있는 형식으로 제안하고 싶다. 그러니 나의 고전을 당신이 영영 읽지 못해도 괜찮다. 참조할 것은 참조 행위에 있다.

December 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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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644호(25년 12월)에서 “창작자들이 뽑은 미래의 고전”을 주제로 청탁을 받았다. 나는 고전이 자신을 고전으로 유지하는 시간 메커니즘을, 어떻게 각자의 삶 속에서 가꿔나갈 수 있을지, 옷과책의 축문으로 작성했다.


텍스트 곁에 머무는 조건은 텍스트의 위대함이 아니다


나의 출판은 고전에서 시작했다. 저작권이 만료된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자매」를 번역해 40쪽 남짓한 소책자로 출판했지만, 내가 고전을 번역한 이유는 내게 그 텍스트가 전혀 고전적이지 못해서였다. 그건 (지난 호[3] 남선미의 말처럼) ‘글과 꼴이 함께 가지 못하는’ 세계고전문학전집에 불과했다. 흔히 ‘견디고 살아남았다’로 비유되는 고전은 내 앞에 도달해 자신의 시간성을 과시하고 강요하지만, 그 시간은 내가 겪어본 적 없는 외부의 것이었다. 나는 ‘이게 뭐가 좋은데?’라는 반발심과 호기심으로, 한국의 모든 역본을 비교하며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다. 텍스트를 탐색하고 고민하면서 한 글자씩 옮겨 가는 나 자신의 시간에 의하서, 비로소 ‘자매’라는 텍스트는 내게 고전이 되었다. 그것이 고전이 스스로를 고전으로 유지하는 시간 메커니즘이었고, 대개 사회적으로 강제되던 그 시간성을 내 삶의 시간 속에서 직접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자. 텍스트의 곁에 머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미디어버스 임경용의 인용처럼) 점점 “즉시 출판”의 시대에 이르는 오늘날 말이다. 화이트리버의 남선미와 함께 짓고 출판한 『어떻게 ‘독립출판’인가: 접두사 독립의 수행성』은 바로 그 시간을 수행하고 기록한 책이다. ‘당신의 출판을 말해달라’는 남선미의 제안으로 우리는 텍스트 곁에 머물러 보기로 했다. 그 머묾의 시간은 의무 교육의 의자 위에서, 유행이라는 문화적 흐름에 휩쓸려, 전문가 집단의 떠들썩한 상찬을 따라서, 때로는 무관심하게, 때로는 뒤쳐질까 불안한 마음으로, 때로는 의심스럽게 텍스트를 접해온 것과는 다른 경험이었다. 나는 적당히 묻어두어도 좋았을 나의 어설픈 첫 출판으로 거듭 돌아갔다. ‘이런 걸 왜 하냐’는 말에 ‘그냥’으로 답할 뿐이던 나의 출판 행위를 스스로 구하기 위해, 나는 주기적으로 내가 출판한 텍스트를 다시 읽고 설명했다. 그때마다의 나는 각기 다른 시간선의 타자였고, 그 읽기가 나의 다음 행위를 조정함으로써 (프리즘오브 유진선의 표현대로) “모범”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책들은 나에게 고전이 되었다. 고전에서 참조할 것은 고전성 그 자체였다.


이렇듯 텍스트의 곁에 머무는 조건은 텍스트의 위대함이 아니다. 시대를 꿰뚫는 정교한 이론도, 취향을 초월하는 미적 충격도, 나에게 유통되지 않는다면 쓰레기에 불과하다. 반대로 쓰레기라 불리는 텍스트도, 나에게 유통되어 끊임없이 참조된다면 고전이 된다. 관심은 인식에 앞선다. 나에게 그 인식을 열어준 유통망이 ‘당신의 출판이 궁금하다’던 동료의 관심이었다면, 당신의 조건이 무엇일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확신한다. 그 조건은 “창작물만이 아니라… 상황들에 대한 이해관계 형성과 그것들에 연결되는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관심사들”(류한길)[4]에 의존한다. 그것은 작품론, 작가론에 기초한 제도적 평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이해의 막막함 앞에서 내가 떠올릴 진(Zine)

아무 것도 없는 흰색 표지 좌측 상단에, 나비 두 마리가 날아가고 있다.
나는 텍스트 프레스 정동규에게 ‘동료’라는 말을 배웠다. 그에게 ‘일의 기준’을 물었을 때, 그는 “동료와 일한다”라고 답해주었다. 나는 (유진선의 말처럼) 그 말을 믿었다.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음에도 비판적 사고를 잘 하지 못한다. 나는 대체로 믿어버린다. (전기가오리 신우승의 말처럼) 나 또한 강단에 머물렀다면 ‘위대한 남성 철학자의 알쏭달쏭한 문장을 최대한의 호의로 해석하는 일’에 종사했을지 모르겠다. 그 절대적 믿음이 고전의 또 다른 조건이라면, 고전이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니라 믿기에 고전이 된다. 나는 그에게 동료가 ‘무엇’인지 직접 묻지 않았다. 텍스트 프레스가 출판해가는 ‘어떻게’를 그 답으로 여겼다.


『낙수의 언덕』은 “2025년 9월 10일 수요일부터, 2025년 9월 12일 금요일까지, 부산 망미동, 낙수의 언덕에서 발신해, 부산 망미동, 텍스트 프레스가 수신한 글자와 이미지들”[5]로 지은 책으로, 텍스트 프레스의 네 번째 진(Zine)이자 “부산 친구들” 선집의 첫 책이기도 하다. 24쪽에 불과한 이 책을 읽고 또 보아도, 낙수의 언덕이라는 책방이나 텍스트 프레스라는 출판사를 온전히 알 수 없다. 작은멋쟁이나비에서 “나를 보았다고 하면 너는 날개를 끄덕여 줄 수 있니”라고 묻는 그는 누구일까. 매일 광안리 해변에 앉아 있는 남자가 사라지지 않도록, 태풍이 부는 날에도, 새벽 다섯시에도 달려가 지켜보던 그는 누구일까. 알 수 없다. 그 알수 없음에 의해서 나는 텍스트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앎’에 요구해 왔던 ‘온전함’은 무엇이었나. 문자로 환원된, 내게 곧장 수용 가능한 형태를 나는 ‘이해’라는 이름으로 요구해왔다. “사람들에게 방송 제작을 핑계로… 남의 삶을 마음대로 오리고 붙이고 무엇이 더 극적인 스토리라인으로 구성될 수 있는지만을 생각했던 날들”처럼 말이다.


이 책에 그런 ‘이해’는 없다. 나는 내가 바랐던 ‘온전함’과 ‘앎’의 관계를 자문하게 된다. 이정민이 책방 일과를 마치고 3일간 전달했다는 파편적인 일기, 단상, 기억과 그것을 살피고 배치한 정동규의 디자인으로 지어진 『낙수의 언덕』을 나는 이해의 공간이라 부르고 싶다. 지금껏 내가 그 공간의 바깥에서 전체를 조망해 ‘이해’라고 대상화했다면, “독자와 책 사이에 삶을 마련할 수 있는 출판사를 만들어나가고 싶다”는 텍스트 프레스의 바람처럼 『낙수의 언덕』은 발신자와 수신자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덕분에 앎은 있거나 없는 소유격에서, 알아가거나 포기하는 행위격이 된다.


‘알겠다’는 말로 중단되는 앎이 아니라 ‘모르겠다’에 의해서 지속되는 앎. 관심의 지속이 인식의 수용에 이를 때까지, 내가 『낙수의 언덕』에 머물고 텍스트가 나의 곁에 머문 까닭은 이정민이 발신한 문자의 몫만은 아니다. 그것을 수신한 텍스트 프레스가 어떻게 서로 다른 두 언어를(즉 정동규와 이정민을, 문자와 시각을, 독자와 책을) 조율했는지, 디자인의 역량이기도 하다(1인출판사인 텍스트 프레스는 정동규에 의해 디자인과 편집이 함께 이뤄진다). 여기서 ‘수신했다’는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관습적 용례는 아닐 것이다. 발산하고 내세우는 방식이 아닌, 주어진 것을 살피고 자리를 함께 찾아주는 『낙수의 언덕』의 시각언어를 ‘수신적’이라고 부를법하다. “작은 마음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의자를 놓자.”는 제안처럼 글자의 ‘작음’은, 흔히 가독성 논쟁이나 유럽의 미니멀리즘을 세련됨으로 받아들여 온 관행과 무관하게, 독자에게 주의를 요구하는 섬세한 마음으로 작동한다. 두 마리 나비만 놓인 표지, 날개면에서 곧장 시작되는 이야기, 이 또한 출판 디자인 관행에 의식적으로 도전하는 전문가적 시도가 아니라, 갑작스럽게 자신을 드러내고 더 알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는 타자의 특성으로 감지된다. 언젠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의 막막함에 짓눌려 있을 때, 나는 진(Zine)의 형식으로 출간된 『낙수의 언덕』을 거듭 떠올릴 것 같다.


정전의 사회사를 연구했던 프랑코 모레티는 “극소수의 책들이 매우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 그게 바로 정전”[6]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텍스트 각자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는 평론을 통해 그 사변적 공간을 만들고자 했고, 근래 서울 인왕산 기슭에 ‘옷과책’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마련했다. “몇 개의 계절을 집어삼키고… 아주 오래 앉아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그처럼, 나의 고전이 될 동료들의 옷과 책을 입고, 읽고, 유통하고자 한다. 이 글을 축문으로 바쳐본다.


[1] 2020년 영상비평지 『마테리알(ma-te-ri-al)』 3호의 「질식자의 편지」를 시작으로 콜리그 등 씨네필 문화의 안팎에서 발생했다.
[2] 강덕구,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 글항아리, 2023, 432쪽.
[3]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기획회의 제643호』, 2025.
[4] 『어떻게 ‘독립출판’인가』 9쪽에서 재인용.
[5] 쪽수가 표기되지 않은 진(Zine)으로, 이하 큰따옴표는 해당 출판물의 인용이다.
[6] 강덕구, 위의 책 432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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