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끈』

『긴 끈』

“내가 내 책의 유용성을 정의한다면, 아마 그것이 내 책의 유용성일 것이다… 내 책은 일종의 연구 프로그램이다.” (P. Bourdieu)

지음  이여로

발행  기획:1

일시  2019~2020

무게  150g

ISBN   9791196604936

15,000

10 in stock


Description

소개1

“문학”은 곧잘 “시와 소설”에 동일시 되었다. 기껏해야 “평론”이나 “에세이”가 그것에 추가된다. 나는 내가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인 문자와 함께 무언가 만들고 싶었지만, 문학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문자 예술”이나 “북웍스(Bookworks)라 부르며 비문예적 창작을 시도했다. 나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재료로서 나의 일기와 책과 길거리에서 수집한 텍스트를 사용했다. 인용의 분야는 동시대 시나 소설, 누군가의 유고, 이론서나 학술서, 동네 전봇대와 블로그 이웃들에게 채록한 것 등이다. 온전히 나의 관심에 집중함으로써 장르적 구분과 텍스트의 사회적 위계를 무시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시작부터 끝까지 나란히 이어지는 줄글”이라는 문학의 매체 특정성으로 환원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단어 하나하나가 지시하는 뜻을 따라 읽을 때” 글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각적 배치라는 의미에서 디자인적으로 조형된 글 무더기들은 감각이나 인상을 따라, 그것들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어가며 만들어내는 리듬에 따라 읽을 수 있고, 그때 우리는 문자를 비문자적으로 이해한다. 나는 이러한 잡다한 것들과 함께 어떤 지식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이 책에 인용된 것들은 그 시절까지 내게 축적된 어떤 취향과 편견들로, 나의 일부를 이루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좋아하는 동시에 벗어나고 싶었다. 내용을 추상해버리는 형식주의적 접근을 통해,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나로부터 분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어떤 장르라고 불러야 할지 오랫동안 알 수 없었고, 이 책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지도 몰랐다. 나의 고민과 선택이 반영되고 그것이 타인들과 감각으로 공유됨으로써 하나의 언어를 만들었다면 충분했다. 1판 100부, 2판 150부를 제작했고 서울시립미술관 아카이브센터 등에 수집되었다.

 

소개2: 『어떻게 ‘독립출판’인가: 접두사 ‘독립’의 수행성』중에서

나는 막연히 만들고 싶었다. 대상도, 목적도, 기술도 갖지 못한, 그 만들기의 욕망은 무엇을 바라고 상상했던가. 바로 만들기였다. 만들기는 언제나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위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자매』를 만들면서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만들기를 나는 욕망했다.

이는 보리스 그로이스가 “오늘날의 세계에서 예술은 개인적 책임감을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 이라고 말했던 맥락과도 상응한다(유일하진 않다). 만들기라는 작은 (세)계에서 온전히 내가 선택한 결과를 마주하는 일, 그 책임감의 경험은 당시 25살의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중간소득국가에서 뒤늦게 선진국에 진입해가던, 시민적 생애 자체가 강하게 제도화되던, 남한의 서울에서 나고 자라, 자연스럽게 대학교에 진학하고, 군대에 가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는, 동시에 이 경로를 자연스럽게 느끼는 계급적 생애주기 속에서, 내가 애쓴 무언가는 항상 제도적 성취로 환원되었다.

그것들은 증명이나 취득이었지, 책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차원은 아니었다. 그렇게 만들기를 욕망했지만, 만들기는 구체적인 매체와 기술이 필요했다. 나는 의무교육으로 ‘문자’를 다룰 수 있었지만, 전문 기술인 ‘문예’는 없었다. 재료가 될 문장을 직접 만들 수 없기에, 그간 책과 거리에서 수집한 텍스트를 재료 삼았고, 인용이라는 기술로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만들기는 책임의 차원을 열고, 그 책임의 주체로 ‘나’를 발견 혹은 발명한다. 하지만 그렇게 마주한 ‘나’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만족을 주던 것, 내가 탐닉하던 것을 모아 놓았을 때, 그것들로부터 등장한 ‘나’는 무척이나 전형적이었다. ‘근대적 남성 지식인’이라고 할까, 언제나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관조하며, 자처한 고립의 자리로부터 자기 연민을 느끼고, 그럴수록 더더욱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빠져들고, 그 가치에 반복적으로 자기동일시하는, 타자와 세상과 갈등하고 이해하기보다, 내면의 반성에 골몰하는 관념론…

나는 꺼내놓은 ‘내’가 무척 불편했다. 하지만 그것을 버리는 일은 내가 내 발을 꺾는 것만 같았다. 문제를 느끼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구속감 속에서, 나는 ‘나’를 이루는 내용을 형식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내가 탐닉하던 것들을 ‘마음껏’ 내놓지만, 누군가의 일기 혹은 기록이라는 형식으로 그것을 중립화하고, 어느 순간 좌면과 우면이 뒤섞이면서 저자성을 확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긴 끈』에 《긴 끈을 위한 읽기》 라는 낭독음반(spoken word)을 만든 이유 또한 그러했다. 문자를 목소리로 극복하기 위해, 나는 15명 가량의 사람을 찾아 각기 다른 인용문을 각기 다른 목소리로 녹음했다. 인용문의 내용을 숙지하는 철학 교수도 있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나의 아버지나, 스님도 계셨다. 그들은 ‘시키니까’ 읽지만, 읽고 나면 읽은 내용을 질문하거나 비판했다. ‘자신이 평소에 발화하지 않는 남성적 말투’이기에 문자는 변형되었고, 말의 리듬과 한숨은 문자를 초과했다. 목소리는 문자를 의심하고, 웃겨하고, 무관심해하면서, 내가 그간 묵독해오던 머릿 속 하나의 목소리는 타인들의 목소리로 대체되었고, 문자는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긴 끈을 위한 읽기Reading for a length of line>

팔황단이 음악감독을 맡았으며, 영국의 레이블 차이나봇에서 2020년에 음원으로 발매되었다. 팔황단(닥터고딕)은 2000년부터 웹 기반의 지하만화(ExCF), 플래시 애니메이션, 심영물 등 한국의 초기 밈, 전자음악, 인터넷 방송 등을 이어 왔는데, 그의 작업을 보고 자라왔기에 자연스레 그에게 연락했다. 유튜브 채널 ‘MEATBALL’의 구독을 권한다.

 

 

 

 

 

 

소개3: 시각성과 문학성, 혹은 “문학미술”

 

‘소설’이 온갖 종류의 ‘글’을 포섭할 수 있는 메타 장르적 성격을 잃고 그 자체로 장르화된 된 것과 다르게, 미술이라는 개념 혹은 제도는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그 용례의 시원에 따라(즉 1747년 바퇴가 ‘순수한 예술fine art’을 구분한 이후로, 1873년 일본이 만국박람회 출품 규정을 번역하며 이를 ‘미술’이라 번역한 후 지금까지) 개방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주된 관심이 ‘언어를 사용한 예술’ 혹은 ‘언어 사용 일반’에 있으면서도 문학장이 아니라 시각예술장을 경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의 바람은 사회 세계에 관한 담론 생산자들로 하여금, 객관적 거리를 두는 과학적이고 건조한 언명이 있고, 경험적으로 더욱 민감히 관여하는 문학적 형식이 있다는 지독한 양자택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를 창조하는 것이다” (P. Bourdieu)

《개별꽃》은 2020년 ‘신신’이라는 디자이너 듀오로 활동하는 신해옥과 협업자들이 함께한 프로젝트이자, 그 일부로서 제작된 ‘책’이다. 《긴 끈》은 이여로가 2019-2020년 제작한 책으로, 두 책 모두 본문의 상당수가 인용으로 이루어진 유사한 형식을 가졌다. 이 두 ‘책’을 다루면서 살피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글’을 ‘작품’이라고 말할 때 어떤 기준을 갖고 있는냐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글’을 “뛰어난 글의 상태”로 이해하고 또 “무엇이 뛰어난지” 해설, 주장하는 작업과는 별개이다. 이 글은 그러한 작업이 대체로 글줄로 구성된 문장 내외부의 미시적 분석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하고 이를 ‘내재주의적’ 접근이라 말할 것이다. 이 때 ‘내재적’이라는 말은, 한국문학의 영역이 여전히 다음과 같은 매체 특정성과 동기화되어 있다는 주장과의 연결을 염두에 둔다.

(1) 한 매체는 그 자신의 효과들을 낳는 하나의 물리적 실체로 정의된다.
(2) 이때 이 매체는 자신의 물질적 특질들로부터 비롯된 고유한 본질을 유지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3) 이 매체의 고유한 본성은 개별 예술에 부합하는 표현과 탐구의 영역을 지시하거나 좌우한다. 1)

1) Noël Carroll, “Medium Specificity Arguments and the Self-consciously Invented Arts: Film, Video, and Photography,” Theorizing the Moving Imag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3-8. 「매체를 넘어선 매체 :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담론」(김지훈,〈美學〉, 2016년 제82권 1호, 74쪽)에서 재인용.

1922년 안확이 “문학미술”이라 말했던 것이 지금 적합한 분과를 거쳐 ‘문학’으로서 제자리를 찾았다고 말해야 할까? 오히려 1922년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내게 문제적으로 보이는 것은 “단일한 물리적 실체로서의 매체를 예술적 형태와 개별 예술의 변별성, 그리고 예술가의 실천에 대한 선험적인 조건으로 설정”2)해놓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글이 어떤 규범적 지평을 전제하고 있다면, 바로 3번과 관련된 과잉 대표성이 지적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이러저러한 사업체 대표, 학계의 동업자 모임, 위원회의 위원들, 교수, 평론가, 작가 등으로 이루어져 발언하는 실체적/인격적 집단” 그 자체를 문제 삼거나, 그 담론계 내부의 당위명제들과 그 이데올로기적 규범을 논박할 이유가 최소한 나에게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에 관한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개별 사례와 함께 조만간 발간될 모 잡지에 더 적을 예정이다.

2) 위 논문, 75쪽.

신해옥은 취미가(*권순우)에서 구현된 공간 디자인(*한주원) 및 퍼포먼스(*황주영)를 ‘전시’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책 작업’이라고 부르며, 이들을 매개자가 아니라 생산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말들은 현재 ‘문학’ 장르를 유지하는 제도적 환경(사변적으로는 근대 미학 규범에 대한 검토 부재, 물질적으로는 자신을 낳는 시스템에 대한 외부화 부재, “로인한 문학 ‘자체 형식’의 특권화, 교육 체계에 편입되는 정전화 작업 등등) 속에서 “저자의 죽음”이라는 바르트의 언명이 제스쳐로 환수되며 도덕적 전제로만 성립되는 것과는 매우 다르게, 실효적으로 들린다. 이는 실제로 이 책의 저자가 다수로 등록되어 있다는 외부적인 차원에 적용되어 있는데, 동시에 이 프로젝트는 ‘글’이 다른 매체로 변환되고 번역된다는, 그러니까 ‘글’과 ‘전시’로 구분된다는 식의 경험 내적 구분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줄글의 구성이라는 내적 형식과 인쇄된 글을 읽는다는 경험에 근거한 텍스트 독해에 개입하는 외부가 과연 ‘글’에 부차적인 것일까? 이 말이 품고 있는 관습적인 의미 지향성을 차단하고 생각하면, 우선 텍스트로서 글에는 의사소통이 없다. 텍스트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라는 두 항을 이중으로 소거할 때에야 기능한다.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이 “독자의 탄생”을 위해 치른 대가라고 말하는데, 글을 말하기와 비유하여 계속해서 대화라고 말하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글 외부에 있다고 여겨야 한다.

여기서 특정하고자 하는 ‘문학미술’이라는 게 있다면 이 외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 글줄’이라는 언어 예술의 관습적 내재성으로 환원하지 않고 작품의 한 차원으로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글줄 내부에서 처리할 것’이라는 문학 장르의 요구를 대하는 두 책의 형태는, 주트로프의 원통형 드럼 안팎이 뒤집힌 모양새처럼 보인다.

작품과 경험

작품을 제도에 의해 “고정된 모든 담화”(*Ricoeur)라고 해보자. 문장의 전반부는 물적, 인지적 제한을 담고 있다. ‘담화’라는 비유적인 표현은 여기서 다루는 대상이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취급되는 사물이 아니라 ‘읽기를 요구한다’는 다소 의인화된 것임을 의미한다. 이를 생성하는 기관과 기제에 대한 분석은 차치하고 다만 그것이 지각하는 주체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가 작품과 작품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구별짓는 성향이 있기 때문”(Bourdieu)이라고 다소 환원적으로 말해볼 것이다. 가령 그러한 구별을 가능케하는 차이는 ‘체계적’이어야만 특정한 대상으로 귀속되고 존속될 수 있는데, 이러한 ‘체계’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살피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체계의 반대항에는 개별성으로 환수되지 않는 어떤 환경이 있고, 우리가 ‘경험’이라 일컫는 인지적 범주가 그 환경에 접하는 것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경험은 작품의 재료인가? 재료나 원천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지각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는다. 경험을 소박하게 우선시하며 존재론적 우선성을 부여하려는 경향 속에서 이를 정태적 구조로 파악하는 것은, 신해옥의 말처럼 “완성된 거미줄을 보고 거미의 실샘에서 나온 첫 바늘땀이 어느 지점인지 찾으려는 시도처럼 공허하다”. 이 지점은 지각 주체의 시선(특정한 모양으로 중간이 뚫려 있는 판을 눈 앞에 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에 따라 달라지며, 그 시작점을 일컫는다. 경험이라는 말은 현상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양적으로 볼 때, 작품은 자신을 “성립하기 위해 매개되는 미디어들”(*사이토 타마키)을 가지고 있다. 반면 경험이 놓인 ‘환경’은 그 현상이 경험자에 귀속된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드다.

이 문단의 시작과 끝은 모순된 것처럼 읽힌다. 그 환경은 개별성으로 환수되지 않는데, 그 환경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은 경험자에 귀속된다(개별성으로 환수된다). 이 모순은 상이한 차원의 존재를 지시한다. 즉, 이 환경 ‘내부에서’ 개체에게 발생하는 현상은 철저히 각 개체 자신에게 고유하다. 그런데 바로 그 공유 불가능한 고유함으로 인해서, 이 환경 ‘외부에서’ 보았을 때 이 공유 불가능함은 이 경험들을 모두 ‘경험’이라는 일반명사로만 통용되게 만든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경험’들은 모든 화자에게 공통된 부분을 일컫는 외연으로만 존재한다. 가령 우리가 ‘길거리의’ 나무를 보면서 ‘이’ 나무라는 고유명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처럼 경험은 존재하며, 여기서도 ‘모든 사람은 지문이 다르다’ 정도의 특이성들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개별적인 존재 주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지각을 구성할만큼 체계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겨짐’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집단과 상식의 문제다. ‘여기서 발생하는 모든 담화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합의된 인지적 전제조건들의 영역이 있다. 우리는 물론 ‘개인적으로’ 이 상식을 의심할 수 있고 이것이 작품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의 회의론자가 어떤 지식도 불확실하다고 의심할 수 있지만, 이 의심하는 자가 놓인 공동체 속에서 ‘상식’이라는 이름 하에 합의되는 최저의 지평 아래를 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이, 그것은 끊임없이 개인적인 것으로 환수된다. 이러한 ‘상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제도와 장치를 만나게 된다.

가령 2016년 6월에, 긴 끈의 저자는 “가려진 철골 위에 둥지를 짓는 맷비둘기를 보았다. 소총을 겨누면 맞출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런 생각이 든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은 저자의 군복무 시절에 남긴 기록이지만, 193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강제 징용된 자가 남긴 기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허구’(즉 상식이 아니라는)라는 인식 하에서만 그 말은 의사소통될 수 있으며, 매번 ‘이것은 허구입니다’라고 말하는 번거로움을 감축시키기 위해 그것을 전제하고 있는 영역을 예술이라 말하면서 그것의 사회적 일면 중 하나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상식적인 접근이, 그것이 ‘비-상식’임을 인지하지 않거나 드러내지 않을 때, 상식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만약 이것이 개인 단위로 발생하면, 그 개인은 정신질환자로 분류될 것이다. 즉 “어떤 개인이 이런 근본적인 관습을 무시하겠다는 선택을 한다면, 의식적인 경우 그는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이고, 순진한 경우라면 캉디드(Candide) 같은, 허구나 실제 삶 속의 온갖 바보들이 받았던 지독한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3)

3) 이여로, 긴 끈(2판),  기획:1, 2020, 10쪽에서 재인용.

그리고 작품과, 무엇을 작품으로 인준하며 작품에 관한 합당한 논의와 합당하지 않은 논의를 구분하는 장치를 제도로서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예술은 이러한 상식의 기준을 놓고 가늠하는 멸균된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예술에 부여된 자율성의 기능이며, 사회는 이것을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함으로써만 인정한다. 일상에서 ‘중2병’이나 ‘예술충’이라는 말로 일컬어지는 현상은 이러한 구분에 대한 개인적 일탈 혹은 망각이며, 이 구분을 개인적이고 개별적으로 무화시키려고 할 때에 개인이 직면하게 되는 사회적 인식인데, 이를 집단적으로 시행하면 전위라고 불린다. 위와 같은 서술은 모두 규범 미학(상식을 강화하는 쪽)과는 반대되는 목적을 띤다.

이렇듯 상식의 맥락을 벗어난다고 할 때에 그것은 소재적 측면과는 무관한 것이며, 그 방식을 한 가지 측면에서 구분해보면 또다른 맥락으로 기록을 이전하거나(외재적 접근), 맥락과 무관한 보편적 기술을 활용하여 기록을 제작하는 것(내재적 접근)이다. 후자는 가령 어떠한 기록 자체가 보편화되는 것과 다르다. 우리는 보편화된 기술을 통해 만들어지는 특이성만을 개별성으로 이해받는 환경, 개인의 방언을 통한 진술은 허용되지 않는 환경에 있다.

작품은 그것을 작품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들을 필요로 한다. 이 장치는 기법과 정합성이라는 내재적 기준일수도, 그것을 인지하는 주체들 사이에 합의된 약속들일 수도 있다. 가령 우리는 아무렇게나 흐트려 놓은 물건을 작품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그것이 특정한 맥락 속에서는 작품이 된다. 그 맥락은 의미가 투영된 장소들(단행본, 화이트큐브 등등)일 수도 있고, ‘저자’일 수도 있고, 담론적 뒷받침(작품 바깥의 스테이트먼트들), 담론 생산자들의 사적 커뮤니티 등등일 수도 있다. 우리는 대체로 후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작품화를 ‘수준 이하의 것’이 외적인 힘으로 등재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특정한 ‘주제’와 같은 인지적 구심점 없이, 인용문들을 모아놓았을 때 이것은 어떻게 작품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책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17세기 유럽의 사람들이 빈 수첩에 그들이 좋아하는 글귀와 단어를 정갈하게 모아만든 것”과 같이 “비망록” 혹은 노트, 문서더미라고 불려야 적합하지 않을까? 그저 “자신 가까이에 두고 감상하던 꽃 뭉치”로 여겨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제작자가 투영한 지향성을 최소화하고, 이것이 ‘읽기’를 요구하는 ‘책’이라는 제도 안에 기입되었을 때, 의미는 해석자의 주관에 따라 자율적으로 생성된다. 그러나 독자는 동시에 “그 패턴을 읽는 방법은 내가 결정할 수 있지만 순서를 정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구조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내 몫”임을 받아들여야 한다.4)

4) 구정연 외 5인, 개별꽃, 화원, 2020, 16쪽.

“만약 영화에서 본 것이 오직 내게만 보이는 것이라면 그건 전혀 흥미롭지 않다. 그것은 공유될 수 있어야만 흥미롭다. 나쁜 해석은 내가 본 것을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경우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이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거기, 이미지에 없기 때문이다 (Jacques Amount)

영화 연구자 자크 오몽은 “너무 많은 투사를 피하면서 진정 유용한 해석, 해석의 방식으로 창조적인 해석”에 대해 논하면서 위와 같이 말했다. 그러나 자신이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내재적, 규범적 중력을 무시할 수도 있다. 자신의 경험(순수 주관)을 작품을 통해 객체화하는 것과 반대로, 개별꽃이라는 프로젝트는 작품으로 선제시된 객체에서 시작해 수용자의 순수 주관을 그 자체로 끄집어낸다. 우리가 ‘일반 독자’의 이러한 해석을 대체로 시시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 해석의 질적 수준에 있다기보다, 애초에 우리가 ‘그것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는 선험적인 범주 구분에 있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을 방향짓는 이 선험성은 작품의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개별꽃》은 〈리딩서클〉이라는 하위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특정 페이지를 발췌해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었다. 모든 종류의 행사를 중간에 그만듣고 나가는 사람(*이여로)이 이 행사를 끝까지 그것도 흥미롭게 참여했다는 사실은 무언가를 증명한다. 대다수의 ‘행사’가 ‘사담’으로 귀결되거나 ‘책에 관한’ 어설픈 ‘공적 담화’로 위장되는 것과 매우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왜인가?

박다함 씨가 제작한 믹스. 낭독이 포함된 버전은 우주만물과 더북소사이어티에서 구매 가능. 차후 어디 레이블 통해 나온다고 함.

https://m.mixcloud.com/park-daham/mix-for-gathering-flowers/

21명이 각기 다른 인용문을 읽고, 팔황단(고두익)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하여 완성된 오디오북

A Length of Line, written by Ee Yeoro | Pal Hwang Dan | CHINABOT (bandcamp.com)

https://music.apple.com/kr/album/a-length-of-line/1529378337

‘개별꽃’과 ‘긴 끈’이라는 이름의 환기하듯, 두 책은 해석을 대하는 입장이 다르다. ‘긴 끈’이라는 이름에서는 여전히 해석의 중력, 해석의 주체로 작용하고자 하는 불안과 염려가 느껴진다. 이 책은 실제로 문장의 의미값들이 어떻게 선택되고 배치되는지, 내재적으로 구조를 미리 짜놓으려고 시도했다. 반면 ‘개별꽃’에서는 발췌문들이 이어지는 2부(긴 끈도 총 5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지만, 이것은 독립적인 레이어는 아니었다)에서는 “비정형의 도형과 선”으로 이루어진 조형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조형물은 어떤 기능을 하고 있을까? 비인격적인 의미 해석의 절차를 시각화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주관을 끄집어냄으로써 의미화의 장에 들여놓는다는 윗 문단의 이해와 상충하지는 않는다. 책 자체의 구조에 관한 언급에 가깝다. 주식 투자를 앵무새나 개에게 맡겼더니 수익률이 더 높더라는 농담을 들어본 적 있다. 여기서 ‘벌레’처럼 보이는 이 조형물들은 아마 대다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의미를 엮고 똥을 싸듯 생산할 것이다.

 
긴끈에도 조형물(파트라슈)가 투사의 대상을 자처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매우 투박한 방식이다.

개별꽃의 1부와 3부는 본래 제도가 대리해야 할 역할을 작품 스스로가 제안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책은 스스로를 장르화하기 위해, 그 장르를 가능케하는 조건과 결과물까지 함께 소개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1부는 선집의 어원에서부터 이 프로젝트의 성격을 직접 진술한다(이는 문학 단행본에서 표지 앞뒤에 적히는 요약글이 맡고 있던가? 아니면 보도자료를 쓰는 편집자, 혹은 문예지 평론가들이?). 3부에서는 2부의 발췌문들을 마치 탐험하는 듯한 익명의 기록문이 남겨져 있다. 이러한 장의 구분은 책 자체가 아니라 신해옥의 텍스트로 한정 되는데, 1,2,3부를 지나 ‘책’은 <개별꽃> 다음으로 김뉘연, 린다 판 되르선, 구정연의 글로 구성된다.

‘책’이라는 매체 기반의 경험, 그 내부에서 디자인이 맡고 있는 구조적-수행적 측면에 대한 언급, 19세기 포스터걸로부터 추적을 시작하여 현대 팝스타의 옷을 뒤집어 쓴 이미지에 도달하는, 생존하는 움직임과 문화적 의도를 연결시키려는 “매력적인 동시에 좌절스러운” 탐구, 아티스트북의 연원과 개념이 “책의 구조를 통해 특정한 읽기를 추동하는” 방식 등등.

긴 끈은 책 내부에 상이한 외부들을 만들어 놓지는 않았다. 대신 이 책은 일기라는 형식을 기존의 맥락을 탈락시키고 일방적으로 적용시킨다. 각 페이지의 상단에는 이것이 기록(일기)임을 증명하는 날짜가 적혀 있다. ‘실제로’ 이 날짜와 글은 저자의 기록에서 발췌한 것인데, 인용한 나머지 절반의 글 역시 똑같은 일기 형식에 놓여 있다. 또 인용을 증명하는 출처는, 책 뒷편의 미주로 밀어넣어 본문에서는 일기와 일기 아닌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접근은 창작자가 특정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점도 있다. 가령 <긴 끈>은 그냥 재밌는 문서더미나, ‘ㅠㅠ’ 울고 있는 이모지로 읽혀도 상관 없으며, 이러한 작품화의 충동을 제거하고 다시금 ‘수집가의 노트’로 읽혀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