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

『자매』

처음 출판을 시작할 때 ‘이런 걸 왜 하냐’는 말을 줄곧 들었다. ‘그냥’으로 답할 뿐이던 나의 행위를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나는 주기적으로 내가 출판한 텍스트로 돌아가 다시 읽고 다시 설명했다. 어느덧 본문보다 길어진 그 설명의 역사를 남겨 본다.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의 「자매」 한 편을 옮긴 소책자.

 

 제임스 조이스

번역  이여로

출간  2019년 2월 1일

크기  105*170mm

무게  52g

ISBN  9791196604905

4,000

200 in stock


Description

소개1: 울프와 조이스(2019~2022)

이 소설은 한 소년이 자신을 돌봐 준 사제의 장례식에 가는 길을 그린다. 그 길은 소년의 기억과 내면, 가족들의 의심과 불만, 거리의 빛과 어둠, 사제의 수상한 습관으로 내어져 있다. 이 소설은 당대에 “자연주의적 스케치”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받았으나, 그것은 “사람들이 가장 조심스럽게 감추려고 했던 바로 그 사실들을 노출시키는 조그마한 과오나 제스처, 바람에 나부끼는 단순한 지푸라기 같은” 현현의 미학을 고수하기 위함이었다.

이 정도가 ‘현대고전소설’의 일반적 설명이라면, 나는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미학적 자기 반영의 의미를 스스로 답하지도 찾지도 못한 채 소개글을 끝마쳤다.

3년 후 어느날, 한남동의 울프소셜클럽에서 우연히 버지니아 울프의 강연록을 접하고, 나는 이 설명의 마지막을 적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을 다루므로 중요한 책”이고 “이 책은 응접실에 앉은 여성의 감정을 다루고 있으므로 보잘 것 없다”고, “전쟁터에서의 한 장면은 상점에서의 한 장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지속되던 ‘더욱 미묘한 가치 판단의 차별’을 중단할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에야 우리는 각자의 생활 세계 위에 가치를 재구축할 수 있다.

이렇듯 조이스의 초기 소설은 계층, 계급, 젠더, 세대, 성향에 따라 인물의 대사에 각기 다른 문체가 적용되었지만, 다수의 역본이 번역자의 복화술처럼 느껴졌다. 나는 소설 속 인물로부터 떠오르는 사람들을 찾아가, 원고를 기반으로 본인이라면 어떻게 말할 것 같은지 한국어 구술을 수집한 뒤 반영하여 오늘날의 한국어 환경에서 이 텍스트를 재생시키고자 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말장난(Malapropism) 또한 의역이나 각주 처리되곤 했는데, 무의식과 실수를 통해 화자를 이해시키는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감각적 유사함과 의미의 부조리를 한국어 안에서 찾아내야만 했다. 이외에도 놓치거나 착각하기 쉬운 세부사항들을 국내외 연구 자료를 참조해 바로잡고, 역자의 말을 통해서는 당대 아일랜드의 시대적 배경과 당대 민족주의 운동의 관계까지를 간략히 전하고 있다.

 

 

소개2: 현대문학의 그냥(2023)

어떻게 나는 이 소설을 ‘그냥’ 읽는가? 근대문학의 시작이라는 17세기 서유럽의 소설, 동서양의 고전을 읽을 때, 나의 독서는 껄끄러움에 중단되고 만다. 이 ‘껄끄러움’은 빠르게 교양의 부재, 독서력의 부재, 취향의 차이로 해석된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의 거대한 단절 속에서, 껄끄러움은 필연적인 것이리라. 그런데 1914년 아일랜드에서 작성된 소설이 2019년 남한의 독자에게 ‘그냥’ 읽힌다면, 이 비약과 횡단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오카 마리의 『기억 서사』는 팔레스타인 학살을 비롯한 ‘사건’의 기억을 우리가 어떻게 나눠가질 수 있을지 다루면서, 소설 이전의 이야기 양식인 서사가 같은 공동체에 귀속된 자들에게, 화자와 청자의 공통된 모어 위에서 구축된다면, 소설은 지역, 언어, 계층, 젠더 등이 찢겨진 이질적 독자에 의해 읽혀진다고 말한다. 즉 소설은 ‘어떻게 타자에게 읽힐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성립된 텍스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자매」가 ‘그냥’ 읽히는 건, 번역의 성공인가 실패인가?

유럽적 근대를 통과해 우리에게 도달한 현대의 ‘문예적’ 글쓰기가 일반화되면서, 나는 무리없이 ‘현대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초국가적인 문예공동체를 기반으로 성립된 이 번역의 성공은, 동시에 타자에게 읽혀야 한다는 ‘목숨을 건 도약’을 잃어버린, 제도화와 장르화를 거쳐 번역의 문제 자체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실제로 초기의 현대소설들은 온갖 잡스러운 글들이 깃드는 장소였다. 「자매」에도 장례 안내문, 길거리의 전단지 등이 본문과 구분되지 않고 그대로 삽입되어있다. 지금까지 ‘소설’이 그 문예적 성격과 미학적 테크닉으로 특징되었다면, 오늘날 ‘타자에게 번역되기를 기다리는 텍스트’란 어쩌면 전혀 소설적으로 보이지 않은 채, 우리 곁에서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소개3: 『어떻게 ‘독립출판’인가』중에서(2024)

한때 독립출판이 ‘작가-되기’의 우회로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반면 나의 출판에는 어떤 상징이나 욕망이 개입하지 않았는데, 그건 내가 특별히 독립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때까지 예술계의 관행이나 문화 따위를 ‘몰랐기’ 때문이다. 장식품처럼 꽂혀 있던 세계문학전집을 우연히 꺼내 읽고, 무언가 ‘어색하다’고 느꼈다. 해설을 펼쳐보니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같은 굉장한 말들이 써 있었지만, 와닿지 않았다. 숱한 번역본을 비교하며 읽었지만, 각기 다른 어색함이 만들어졌고, 어쩔 수 없이 직접 번역을 시작했다.  

정본에 대한 집착도, 앞선 번역가들과의 대결도 아닌, 다만 ‘어색함을 해소하고 싶다’는 욕구였던 ‘번역해서 출판한다’는 ‘책상을 깨끗이 치우고 싶다’는 욕구와 다를 바 없이 단순했다. 그 단순함이 “자신의 동기를 완전히 의식한 상태에서 명료하게 제시 가능한 이유들만을 인정하고 그러한 이유에 근거하지 않은 어떠한 행동도 비합리적이라고 간주”하는 합리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반대로 ‘독립출판은 급진적이고 새로운 내용을 말해야 한다’는 ‘독립적인’ 규범을 내가 갖고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세계고전문학’으로 간주되는 제임스 조이스를 번역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공자도, 애호가도 못되는 사람이 조이스를 번역하고 출간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완벽하게 납득시키려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을테지만, 그 몇 년은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냥’ 했기에 나는 내 행동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가 ‘왜’를 자문할 수 있었다. 

독립출판을 (계로서) 경험하는 일은, 프로페셔널리즘의 (세)계가 작은 책 한 권으로 상대화되는 경험이기도 했다. 나는 먼저 기존에 출판된 모든 한역본을 비교했다. 그 과정에서 A4 3장 정도의 분량을 번역하는 데 3달이 걸렸다. 필요했던 것은 ‘유창한 영어 실력’이나 ‘전공 여부’가 아니라, “주의 깊게 번갈아 본다”를 반복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프로페셔널한’ 모든 번역본에 오역이나 누락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인물들의 사회적 존재를 감각으로 인지시키는 다중적 문체, 말장난 등을 오늘날의 한국어 환경에서 재생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텍스트에 부여된 ‘세계고전문학’의 라벨을 떼어내고, 이것을 2019년의 한국에서 왜 읽고 번역하는지, ‘그냥’에서 시작해 텍스트와 나를 오가며 자문해나가는 경험, 텍스트가 행동을 촉발하고(답답하니 번역한다), 행동이 텍스트에 반영되고(2019년의 한국어를 재생시킨다), 다시 행동을 이끄는(원고를 출판한다) 순환의 자리에서 체계는 스스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지금 나는 이 경험을 ‘아마추어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하고 있다).

 

소개4: “텍스트 곁에 머무는 조건은 텍스트의 위대함이 아니다”(기획회의 644호)

나의 출판은 고전에서 시작했다. 저작권이 만료된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자매」를 번역해 40쪽 남짓한 소책자로 출판했지만, 내가 고전을 번역한 이유는 내게 그 텍스트가 전혀 고전적이지 못해서였다. 그건 (지난 호 남선미의 말처럼) ‘글과 꼴이 함께 가지 못하는’ 세계고전문학전집에 불과했다. 흔히 ‘견디고 살아남았다’로 비유되는 고전은 내 앞에 도달해 자신의 시간성을 과시하고 강요하지만, 그 시간은 내가 겪어본 적 없는 외부의 것이었다. 나는 ‘이게 뭐가 좋은데?’라는 반발심과 호기심으로, 한국의 모든 역본을 비교하며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다. 텍스트를 탐색하고 고민하면서 한 글자씩 옮겨 가는 나 자신의 시간에 의해서, 비로소 ‘자매’라는 텍스트는 내게 고전이 되었다. 그것이 고전이 스스로를 고전으로 유지하는 시간 메커니즘이었고, 사회가 강제하던 그 시간성을 내 삶을 통해 직접 가꾸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제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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