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는 이미지들』

『응답하는 이미지들』

지음  이혜목

발행  EVM

쪽수  164쪽

크기  110x180mm

가격  14,000원

일시  2025년 11월 14일

ISBN  979-11-995246-1-3 (03680)

14,000


Description

『응답하는 이미지들』은 영상창작자 이혜목의 작업(노트) 에세이로, 이미지에서 출발해 영화로 도착하는 과정을 ‘응답’의 방식으로 엮어낸 책이다. 파울 첼란, 장-뤽 고다르, 하룬 파로키, 아나 멘디에타, 차학경 등 수많은 영화와 이미지들을 통과해 엮어내며, 도무지 엮일 수 없는 순간에 그 이미지들이 파열하며 흩어지는 모습 역시 기록되어 있다. “무엇인가 죽고 없을 때 그럼에도 남아있는 것을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를 묻는 책의 질문처럼, 우리는 어떤 것의 빈 자리 앞에서 무력함과 마주한다. 우리는 이미지를(혹은 그 무엇을) 경유해스스로가 가진 ‘두 눈’의 힘으로 세계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경유함에 보탤 힘을 찾아내리라는 믿음을, 『응답하는 이미지들』에서 읽을 수 있다.

 

 

차례

프롤로그. 잘못 도착한 편지에 응답하기

1장. 그 나무가 죽은 후에 나는

2장. 이미지 앞에 선다는 것

3장. 돌, 눈, 흙 그리고 새

에필로그. 연대의 형식을 찾아서

 

저자

이혜목

1998년에 태어나 서울시 노원구에서 자랐다. 철학을 공부하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연극 〈가자 모놀로그〉 (2024)를 함께 만들고, 단편 다큐멘터리 〈팔레스타인을 위한 두 대의 카메라〉(2025)를 제작해 여러 영화제에 서 상영했다.

 

추천

세상의 어떤 말은 누구든 한 점씩 이식할 수 있는 관대한 심장처럼 박동하며, 그것을 듣고 읽는 자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내게는 들뢰즈의 1987년 FEMIS 강연문 「창작 행위란 무엇인가」도 그렇다. 강연에서 들뢰즈는 몇 몇 동시대 영화의 예에서 우리가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불일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목소리는 무언가 말하며 점점 상승하는데, 시선은 그와 무관한 다른 것을 보여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내가 이해하는 바, 이때 공기 중 목소리의 떨림은 바람결을 일으키고, 그것은 아마도 나뭇잎 무리를 흔들 것이며, 서로에게 크게 더 크게 파동을 전달하는 사물들은 마침내 지질마저 흔들어 뒤틀 것인데, 그리하여 우리는 이 힘의 창작 및 창작의 힘으로 인해 비로소 지표 아래 시신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그저 한둘이 아니라 계통을 이룰 만큼 연결되어 무수함을, 따라서 폭력과 애도의 시간을, 역사를, 깨우쳐 보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의 이야기에는 온전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구석이 있고, 나는 그 신비에 이끌려 강연문을 거듭 읽곤 한다. 그러는 한편, 땅 아래 시신들에 탐침기처럼 가까이 가는 예술가를 새로 발견할 때마다 우리가 마무리되지 않은 애도의 공동체에 속함에 기뻐하며, 창작은 종국에 저항을 향한다는 들뢰즈 강연의 마무리를 되새긴다. 이혜목의 『응답하는 이미지들』도 그런 창작의 계보에 심장 조직 한 점을 더한다. 아름답게 흔들렸던 나무 한 그루가 죽자 창작자는 그것의 흔들림을 제 것으로 받아들여 동요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며 부서지는, 부서진, 그러다 파묻힌, 다른 존재들로 목소리와 시선을 보내어 연대한다. 식물과 인간, 팔레스타인과 한국, 과거의 국가 폭력과 현재의 참사를 오가며, 목소리와 시선이 필연적으로 분열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며, 부서지는 것을 함부로 봉합하는 대신 부서지는 그대로 그러모으며, 어긋나는 말과 이미지로 저항한다. 이혜목의 창작 에세이를 읽으며 나는 서로 떨어져 알지 못했던 친구를 발견한 듯 기쁘고 감사했다.

 

문학평론가 윤경희

 

책 속에서

가장 공들여 찍은 장면은 내가 은사시나무잎에 손을 뻗은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한 부분이었다. 그 장면은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1930~2022)의 〈누벨바그Nouvelle vague〉(1990) 초반부의 손 장면에 대한 오마주였다. 그 장면에서 서로를 향해 뻗은 두 손이 맞잡듯이, 잎과 손이 서로에게 가닿아 포개지는 모습을 찍고 싶었다. 내 손으로는 느낌을 전달하기 어려워 Y의 손을 대신 찍었다. 은사시나무잎을 몇 초 동안 붙들고 있다가 이를 놓치는 Y의 손이 화면에 고스란히 담겼다.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을 찍은 후에는 사물들을 찍었다. 릴리의 사진을 나무 줄기에 붙여놓고 흑백 사진을 찍는가 하면, 풀밭 위에 나뭇가지를 두고 이를 가만히 응시하는 장면을 오래 찍기도 했다. 그때 비로소 나뭇가지에 제자리를 찾아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흰 나비가 풀밭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40쪽)

 

파로키는 고다르의 질문을 이어받아 다시금 질문한다. 이미지는, 그리고 영화는 왜 실패했는가? 이미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생각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제 그 질문은 내 앞에 도착한다. 이미지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결탁, 그들의 작동 방식을 보여줄 수 있는가? 팔레스타인을 출처로 한 이미지들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이미지들은 더 이상 1980년 광주의 이미지처럼 암암리에 유통되는 것이 아니며 구글 검색 또는 텔레그램 링크를 통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왜 이 이미지들은 더 이상 어떠한 파급력도 갖지 못하는가? 세상이 이미 고통과 전쟁, 죽음의 이미지들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면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더 이상 고통과 전쟁, 죽음의 이미지들 속에서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해서 되묻는다. 현실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밀어 올리는lift up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까? 보는 법과 듣는 법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까? (1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