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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다—배우다”의 사이 공간에서: 이혜목의 『응답하는 이미지들』

February 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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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는 이미지들〉에서 시종 나를 사로잡은 ‘학생됨’의 인상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대학원생이라는 저자의 사회적 위치가 아니며, 통상의 ‘학생 영화’가 뜻하는 습작의, 미숙한 등의 질적 평가도 아니다. 오히려 학생됨을 그렇게 만드는 ‘교육 제도 내부의 바깥’[1]에서 이혜목이 “가르치다—배우다”의 과정을 복권하고 있다는 뜻이다.

가령 상영회에서 누군가 〈응답하는 이미지들〉을 “용기있다”고 표현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일련의 기술적 숙련, 암묵적으로 공유되는 레퍼런스, 그로부터 자리잡는 미감, 깊이로 비유되는 구조나 구성의 복잡함 등이 하나의 집합을 이루고, 그 집합과 내가 일치할 때에야 비로소 ‘보여줄 준비가 된’ 것으로, 학생됨을 ‘벗어났다’고 여기는 기준을 우리가 내재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육 제도 안의 바깥에서 “가르치다—배우다”를 복권하는 ‘학생됨’이란 ‘학생인데도 불구하고’ 그 기준을 충족시켰다는 ‘예외 만들기’가 아니고 그것을 ‘더 잘 하게 만드는’ 진보적 교육의 방법론도 아니다. 다만 “가르치다—배우다”가 서로 다른 두 시스템의 사이—공간에서발생한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면 족하다. 반대로 말하면, 그 사이—공간에서 우리가 만날 때에 “가르치다—배우다”가 발생하고, 이로써 두 시스템이 성립한다.[2]

그는 철학도로서 영화-이미지를 몰랐다. 이미지는 다만 그를 (팔레스타인과 5.18과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의 것으로서) 무너뜨렸고, 그렇다면 반대로 나를 구할 이미지도 있지 않겠냐는 “가능성 혹은 착각”(13쪽)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 빈 자리에 친연했던 나무 한 그루가 들어섰고, 아이들이 뛰어왔으며, 서울에서 팔레스타인을 말하는 영화가 연이어 만들어졌다. 그러나 “내가 한 모든 일들은 오로지 나를 위해 한 일들이었다”(156쪽)고 말해질 때, 이 말은 액티비스트의 자기비판으로 들리지 않으며, 나르시스트의 유아론적 목소리로도 울리지 않는다. “가르치다—배우다”에서 ‘배우는 나’의 정립은 동시에 ‘가르치는 너’의 정립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울 뿐이다.

이혜목은 3장에서 파울 첼란, 차학경, 아피찻퐁을 거쳐 (팔레스타인의) “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실천에는 급진적인 정치적 역량이 담겨있는 것 아닐까”(110쪽)라고 자문하다 〈′′′ (Triple Prime)〉의 보기, 듣기, 말하기를 가르치기로 묶었다. 그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인물의 모습을 촬영한 것만으로는 듣기가 일종의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전달하기 어”렵듯(114쪽) ‘말하다-듣다’에는 논리적으로 “가르치다—배우다”가 선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혜목이 팔레스타인인 시마سيما زايد에게 자신을 가르치기를 요청했을 때, 배우려는 자의 의지는 가르치는 자의 출현으로, “가르치다—배우다”의 사이 공간에 가설된 하나의 영화에 두 의지가 이미지로 관계 맺기 시작한다.[3] 이혜목은 이것을 “응답하는 이미지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응답의 과정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하나를 만들면 그 다음에 할 것이 보였고, 그렇게 매번 내 앞에 주어진 것들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무엇을 한 것인지는 작업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되기도 했다”(13쪽)는 이혜목의 말처럼 만들고, 따르고, 다시 만든다는 보편적 행위의 반복 속에서 하나의 체계(system)가 만들어지며, 우리는 그것을 영화라고 부를 따름이다. 그 응답의 기록으로서 공개된 창작물과 창작의 노트는 ‘영화적인 것’의 기준을 충족하거나 미달하지 않고, 자기 체계의 기준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학생—영화를 분절하면서 이혜목이 참조하는 이름들(고다르, 차학경, 하룬 파로키…)은 그 권위에도 불구하고 다만 참조자의 권위에서만 설명될 뿐이며, 설령 그가 한국의 학술 및 예술계에서 가장 제도화된 경로에 있을지언정, 그가 제도로부터 ‘배우는 것’은 (그것은 제도가 배우기를 은폐해놓는 유일한 것인데) 제도 자체인 셈이다.

‘교육 제도 안의 바깥에서’라는 기묘한 표현을 이제는 해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르치다—배우다”가 ‘교육’으로 제도화되었을 때, 그 제도는 특정한 학교나 학위, 인적 네트워크 같은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행화된 시스템으로서 제도는 나의 바깥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의 의식을 참조해야만 발견되는 무엇인 셈이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말의 뜻을 구별해주는 가장 작은 단위인 ‘음운’이 말하는 이의 바깥에 있지 않다고 보았다. 즉 의식 속에 어떤 의미가 이미 존재하는 경우에만, 의미를 변별하는 형식으로서 음운이라는 것이 나타난다.[4] 그것을 영화 만들기의 최소 단위라고 생각해보자. 그 의미(로서 공유되는 객체적 단위)는 가치(라는 주관적 지향)으로부터 파생하며, 그것에 의존한다.

따라서 학교 내부에 있는 이가 교육 제도 바깥에 있을 수 있고, 학교 바깥에 있는 이가 교육 제도 내부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 자신이다. 이혜목으로부터 참조되는 것은 이혜목의 영화 제도이며, “그것은 마치 언어가 우리 자신들의 언어로부터 알게 되는 현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5] “이것을 만들지 않으면 삶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다고 느낀 것들에 매달리면서”(13쪽) 만들었던 영화 만들기의 가치로부터, 이혜목의 영화는 독자들에게 독립된 의미 체계로 공유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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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야트리 스피박의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태혜숙 옮김, 갈무리, 2006)의 표제를 빌었다.

[2] “가르치다—배우다”의 관계를 주도하는 게 언제나 배우는 쪽이라는 철학적 역설은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1』(송태욱 옮김, 새물결, 1998) 를 비롯한 일련의 연구에서 다뤄진다.

[3]이는 가르치는 자의 지능을 배우는 자가 학습한다는 교육학적 환상을 비판한 랑시에르의 생각이기도 하다. 『무지한 스승』(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궁리, 2025) 참조.

[4] 가라타니 고진, 앞의 책, 24쪽.

[5] 가라타니 고진, 앞의 책, 143쪽에서 재인용. 원전은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박정일 옮김, 올, 2010, 310-311쪽)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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